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더 스미스 (문단 편집) == 영향력 == >It’s amazing to think that what we did still means so much to so many people. From the very first writing session that Morrissey and I had in my attic lodgings, we were excited and high with it. We couldn’t get our ideas out fast enough and that feeling remained in the studio for all of us when we were making the records. Greatness is the best achievement, greatness and recognition from your peers and other artists you respect. We had and still have that, plenty of other stuff too, good and bad and dramatic. But that’s The Smiths. We loved each other and we loved what we were doing more than anything. That’s probably why we still sound good. There’s love in it, inspired musicians, great words and some pretty good tunes, too.“Bless you.” > >'''우리가 한 일이 아직도 그렇게 많은 사람들에게 그렇게 많은 것을 의미하다니, 생각해보면 굉장한 일이군요. 내 [[다락방]]에서 했던 첫 송라이팅 세션 때, [[모리세이]]와 [[조니 마|나]]는 흥분하며 잔뜩 고양돼 있었습니다. 우리들의 아이디어를 가능한 빨리 뽑아내어서, 그 느낌이 남아있는 동안 스튜디오에 가 레코드를 만들고 싶어서 어쩔 줄을 몰랐죠. 위대함이란 것은 최고의 성취입니다. 위대함 그리고 당신의 동료와 당신이 존경하는 다른 아티스트들에게서 인정받는 일 말입니다. 우린 그걸 가졌었죠. 지금도요. 우리의 많은 작업물들과 함께 말입니다. 그들 중 어떤 것은 좋을 수도 나쁠 수도 또 너무 극적일 수도 있지만, 그것이 스미스입니다. 우리는 서로를 [[사랑]]했고 [[더 스미스#s-6|우리가 하고 있었던 것들]]을 무엇보다도 더 사랑했습니다. 아마도 그것이 우리 음악이 아직도 좋게 들리는 이유일테죠. 거기에는 사랑이 있고, [[영감]]을 줬던 뮤지션들, 훌륭한 언어들과 꽤 근사한 튠이 있습니다. "당신들에게 [[축복]]이 있기를" ''' >---- >― [[조니 마]] ([[2007년]]) >스미스보다 더 나은 밴드는 있었지만, [[미학]]을 표현하는 능력과 결합된 협업의 긴장에 의해 형성되는 독특하고 신중하며 강력한 미학을 가졌다는 의미에서 '''더 완벽한 밴드는 없었다.''' >---- >― [[피치포크]][[https://pitchfork.com/reviews/albums/16027-the-smiths-complete/|#]] 더 스미스는 [[1980년대]]의 가장 중요한 록 밴드 중 하나로 평가받고 있다. 또 이들의 시각과 음악성은 [[1990년대]]를 대표하는 [[브릿팝]] 밴드와 전세계의 많은 [[얼터너티브 록]] 밴드 그리고 인디 밴드 등 많은 아티스트들에게 영향을 미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스미스는 어떤 의미에선 진정한 의미의 인디밴드였는데 어떤 곡을 쓸지, 어떻게 만들지, 언제 어떻게 발표할지부터 앨범 커버와 무대구성 등 세세한 컨셉 하나하나까지도 모리세이와 마에 의해 철저히 통제되었기 때문이다.[* 레이블 사장을 신랄하게 까는 가사의 'Frankly, Mr. Shankly'가 가감없이 발매되었을 정도로, 스미스는 작업에 있어서 자유를 보장받았다.] 따라서 그들의 개성이 스미스 그 자체였다. 조니 마의 찰랑거리는 기타 사운드는 지금도 많은 밴드가 참고하고 있다. 1980년대 당시에 주류 기타 연주라고는 70년대 [[메탈(음악)|메탈]]장르의 기타 솔로 중심의 잔재나, [[펑크(음악)|펑크]]장르의 3개 코드만을 사용하는 단순한 기타스타일 등으로 양분되어 있었기 때문에 조화를 중시하는 조니 마의 시도는 신선하면서도 60년대 전통으로의 회귀였다. 기타라는 악기의 본연의 특성에 충실한 그의 스타일은 이후 90년대 [[브릿팝]] 사운드의 기반이 된다.[* 그럼에도 조니 마는 일명 [[브릿팝]]밴드들과는 거의 협연한 바가 없고 스미스 해체 후에는 '일렉트로닉'을 결성하여 댄스음악을 하는 등 여러 실험을 했다. 락스타가 되기 싫어서 옷입는 스타일까지 죄다 바꿨기 때문에 90년대라면 스미스 직후임에도 같은 사람인가 싶을 정도(!) 그의 팬인 [[노엘 갤러거]]나 [[버나드 버틀러]]에게 종종 기타를 선물로 주곤 했지만...] 물론 당시에도 펠트, [[아즈텍 카메라]] 등 찰랑찰랑 거리는 기타 사운드를 내세운 팝 밴드들이 있었지만, 몇십 트랙의 기타 음을 채워넣고 또 채워넣어 빈틈없는 사운드를 만드는 조니 마의 시도는 굉장히 독특한 것이었다. 스미스의 모든 곡을 작곡하고 실질적으로 밴드의 음악적 [[브레인]]이었던 조니 마의 기타 철학은 '음을 낭비하지 않고 반드시 있어야 할 곳에 있어야 할 음을 채워 넣는 것'. 또한 장단조를 넘나들며 기묘한 코드 진행의 작곡법은 사춘기의 정서를 제대로 표현해냈다는 평가를 받는다. [[스웨이드]]의 버나드 버틀러 등 [[브릿팝]]의 많은 기타리스트들이 그의 영향을 받았다. 자세한 내용은 [[조니 마]] 항목 참조. 모리세이는 보컬과 노래가사 뿐만 아니라 팀명, 앨범명, 앨범 커버아트[* 모리세이는 앨범 커버에 쓰일 이미지, 전체적인 컬러톤 및 폰트의 스타일, 위치, 색상, 크기 등의 모든 디테일을 직접 [[스토리보드]]로 만들어서 스탭에게 넘겼다. 그가 동경하던 영화배우, 작가, 소셜아이콘들의 이미지를 즐겨 쓴 것으로 유명하다.], 의상, 무대소품[* 글라디올러스, 안경, 보청기로 대표된다.], 무대매너 등에 고유의 개성을 담아냄으로써 스미스의 독창적인 이미지를 구축했다. 스미스는 모리세이의 기행 [[버프]]를 받아서 떴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고 오히려 모리세이가 없었으면 스미스는 좀 더 순수한 록큰롤 밴드가 되었을거라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다. 물론 조니 마는 80년대 중반 기준으로 지극히 파격적이었던 그 모든 컨셉트를 쿨하게 받아들이고 파트너인 모리세이를 전폭 지지해줬다. 모리세이의 가사는 사춘기의 정서를 있는 그대로 담으면서도 뭔가 [[싸이코]]틱하며, 날카로운 단어 선택이 돋보이고 [[오스카 와일드]]를 인용하는 지성미가 넘친다. 무엇보다 [[블랙 코미디]]의 진수인 그의 가사는 엄청나게 많은 추종자를 자아냈다.[* 2000년대 초반 미국의 히스패닉 청소년들이 모리세이의 음악을 접하면서 모리세이가 쓴 가사를 자신들의 비참한 생활에 감정이입하여 모리세이 열풍이 일었고, 미국에서 모리세이의 음악이 재발견되었으며, 이에 힘입어 모리세이는 남미에서 공연을 하기도 했다.] 오늘날 모리세이의 가사는 [[문학]]계에서 긍정적으로 평가할 정도로 뛰어난 평가를 받고 있다.[[https://www.scotsman.com/news/uk-news/morrisseys-lyrics-are-there-wilde-and-larkin-claims-academic-2511620|#]][[https://iowareview.org/blog/american-academic-and-english-poet-talk-about-smiths|#]] 스미스 시절부터 공연장에서는 모리세이에게 날아오는 부겐빌레아 꽃[* 스미스 시절부터의 상징물로, 모리세이는 바지 뒷주머니에 꽃을 꽂고 무대를 온통 꽃으로 장식한것으로 유명했다. 모리세이와 스미스를 은근 꼴뵈기 싫어했던 [[더 잼]]의 폴 웰러는 '꽃은 흔들라고 있는게 아니라 보라고 있는거야'라고 충고(?)하기도. 그는 영국 인디뮤지션들이 대거 참여한 86년 '레드 웨지 투어'때 참가한 조니 마를 은근 갈구며 따시켰는데 마는 자존심이 상한건지 투어 막판에 스미스 멤버들을 불러서 게릴라 공연을 펼쳤고, 자기들 무대로 만들어버린다. 이후 인터뷰에서, 마는 '레드 웨지 투어' 중 빌리브랙을 제외한 밴드들의 분위기가 좆같았다고 밝혔고(the atmosphere around the other bands on that tour was really shitty), 당시의 게릴라 무대는 스미스가 한 최고의 일 중 하나(one of the best things we ever did)라고 회상했다. 그렇지만 현재 폴 웰러는 조니 마와 사이가 좋다.]과 모리세이와 포옹하려고 무대 위에 난입하는 관객들로 야단법석이었다.[[https://youtu.be/0e_oLiZW9fU|스미스 시절 깽판]] [[https://youtu.be/2rd6mwVRsKk|조니 마가 곤혹스러워했던 공연]] [[https://youtu.be/zKY8wLEENhk?t=53m28s|모리세이의 솔로 시절 자행된 대규모 깽판. 마지막 곡 Everyday Is Like Sunday를 보아라!]] 스미스는 이러한 관객들의 스테이지 인베이전을 적극 부추기고, 멤버들이 입장할 때는 [[세르게이 프로코피예프|프로코피예프]]의 음악을 틀어놓는 등 다른 밴드들이 시도하지 않은 특이한 공연문화를 고안해 냄으로써 점점 더 특별해졌다. 한편 스미스 전반을 지배하는 컨셉은 무엇보다 [[호모섹슈얼리티]]라고 할 수 있는데, 조니 마와 모리세이가 품고 있었던 70년대 락음악과 컬쳐의 마초스러움에 대한 강한 반발심이 표출된 결과다.[* 이 컨셉은 활동 초기때부터 설정된 것이라고 하는데, 상술했듯이 밴드의 초창기 베이시스트였던 데일 히버트는 이것 때문에 갈등을 겪어 그만 뒀다. 그는 아이가 둘이 있는 유부남이었는데 모리세이와 마가 우리 컨셉이 게이 밴드라며 그에 맞게 옷을 입게 하고 머리를 자르게 했다고 히버트는 주장했다. 마의 기억은 조금 다른데 '히버트는 우리가 걔 머리 자르게 해서 그만뒀어. 원래 스타일보다 훨씬 나았는데 말야.'라고 주장했다(...)] 첫번째 앨범 [[The Smiths]][* 이 앨범은 2009년 [[게이]]예술가들을 상대로 설문한 '역대 가장 게이같은 앨범' 2위를 차지하기도 했다.]를 비롯해 여러 싱글의 앨범 커버를 [[게이 포르노]]에서 크롭한 것[* [[조니 마]]가 이러한 [[모리세이]]와 자신의 아이디어를 드러머인 마이크 조이스에게 설명하자 조이스의 머릿속에는 어머니와 교구목사님의 표정이 머릿속에 스쳐지나갔다고 한다. [[앤디 루크]]의 아버지의 첫반응은 "이거 남자 엉덩이네?"였다고(...)]이나 드랙퀸의 사진을 썼으며 대표곡 'This Charming Man'을 비롯해 많은 노래가 남자와 남자의 관계에 대해 노래 하고 있다. 물론 대놓고 하지는 않고 은유적으로. 남자와 여자의 관계를 다룬 노래도 없지는 않는 데, 이의 경우는 여자를 불신하거나 저주하는 내용이 대부분이다.(...) 심지어는 남자로 추정되는 화자가 여자랑 결혼하려는 남자를 질타하는 노래(William, It Was Really Nothing)[* 당시 모리세이와 스캔들이 있었던 그룹 '어쏘시에이트'의 멤버 빌리 맥켄지에게 쓴 곡이라는 설이 있다. 어쏘시에이트는 답가로 'Stephen(모리세이의 퍼스트 네임은 Steven), You're Really Something'이라는 곡도 만들었다.][* 이런 특이한 내용을 담은 탓인지는 몰라도 이 곡은 이례적으로 [[롤링 스톤 선정 500대 명곡]]에서 431위를 차지했다. 참고로 더 스미스의 대표곡이라고 할 수 있는 How Soon Is Now?는 이보다도 낮은 477위고 There Is a Light That Never Goes Out은 아예 목록에 등재되지도 않았다.], 도 있다. OUT 매거진이 게이 예술가들을 상대로 설문한 가장 게이적인 앨범 100선에서도 스미스는 단일 아티스트로는 가장 많은 앨범을 리스트에 올렸다.[[http://www.out.com/entertainment/music/2012/03/19/100-greatest-gayest-albums-all-time#slide-98|#]] 영국 퀴어 시네마의 거장 데릭 저먼은 스미스의 뮤직비디오들을 만들었다. 한편 이런 동성애적인 성격은 모리세이의 솔로시절 더욱 두드러지는데,[* 참고로 모리세이는 최근 자신의 자서전에서 남자와 여자 모두와 관계가 있었다고 밝혔다.] Your Arsenal[* 모리세이의 몸짱 근육이 드러난 세미 누드를 표지로 썼다.] 같은 앨범에서 노골적으로 드러났다. 다만, 최근 모리세이의 주요 팬층을 차지하고 있는 [[히스패닉]]은 [[Macho|마초]]적인 정서를 가진 이들이 많다. [[히스패닉]]들은 모리세이를 열광적으로 좋아하는데[* 이때문에 2000년대 이후 미국 대중 문화에서 히스패닉=모리세이 팬이라는 클리셰로 정착했다. 미드 [[오렌지 이즈 더 뉴 블랙]]을 보면 히스패닉 죄수가 "모든 라틴계 여자들은 모리세이를 사랑하지"라고 말하기도. [[울버린(마블 코믹스)]]이 잠시 사귀었던 히스패닉 여자도 모리세이(와 [[더 큐어]]의 로버트 스미스)의 열렬한 팬으로 등장한다.] 막상 스미스나 영국 록 음악에는 별관심이 없는 희한한 인기. 스미스의 영향력은 음악에만 국한 되지 않았기 때문에 [[브릿팝]] 조류에 있었던 밴드가 아니더라도 90년대 영국 밴드라면 정도의 차이만 있을 뿐이지 거의 모두 스미스의 영향을 받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매닉 스트리트 프리처스]]는 그들의 노래 <1985>의 가사에서 'In 1985, my words they came alive, friends were made for life, Morrissey and Marr gave me choice.(1985년, 내 말들이 생명을 얻게 되었고 동지들이 생겼다. [[모리세이]]와 [[조니 마|마]]가 우리가 선택할 수 있도록 해주었다)'라고 노래했다. 한편 [[피트 도허티]][* 그런데 피트 도허티가 동경하던 모리세이를 마침내 만나게 되었을 때 모리세이가 그를 냉대했고 언론에다 '피트 도허티는 '[[시드 비셔스]]'나 따라하는 클리셰'라고 까서, 도허티는 '모리세이를 한 대 친 다음 일으켜주고 옷을 털어준 후에 화해의 의미로 콜라보레이션을 제안하고 싶다'(..?) 라고 말하기도. (''"When I see Morrissey the next time, I would punch him. And when he is lying on the ground, I would give him my hand. I remove the dust from his clothes - and then I would offer him a collaboration as an act of reconciliation."'') 반면 모리세이는 [[칼 바랏]]과는 꽤 잘 지냈다.]나 [[크리스 마틴]]같은 2000년대 이후에 등장한 뮤지션들도 스미스가 음악을 하게 한 원천 중 하나라고 밝히기도. 스미스는 음악적으로는 스미스만의 완전한 오리지널리티로 계속해서 뮤지션들에게 그 영향력을 넓혀가고 있고, 문화적으로는 소외받은 계층의 조용한 분노를 대변하는 역할을 충실히 하고 있다. 스미스는 당시에는 5년 밖에 활동하지 않은 영국의 [[인디밴드]]였지만 30년의 세월을 거치며 하나의 팝 [[아이콘]]이 되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